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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앙항일운동기념관
위치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소안로 263
이슈캘린더
6월, 호국보훈의 달
소관부처
전라남도
담당부서명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이메일
팩스
홈페이지
http://www.gunsan.go.kr/tour/m2096/view/516308
분류
전시/공연시설,문화재/역사
태그
항일투쟁 독립운동가 왜인등대사건 동학혁명 민중항쟁 애국선열 독립운동사 현충시설
조회수
645
소개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소안의 애국선열들과 그들의항일투쟁 정신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주기 위하여 건립한 현충시설입니다.


일제통치로 전국이 탄압받던 암흑기에 항일구국의 횃불이 드높았던 소안도는, 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고 농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소안학교를 만들어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더불어 독립운동이 가장 강성했던 곳 중 하나였습니다.


앞으로도 구국대의 투혼을 불살랐던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후손들에게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 이용안내 * 2022년 6월 기준

화-일, 9: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 기념관 소개

⊙ 왜인등대사건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1984)의 동학혁명에서 시작 된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후 일본은 일본 상선의 남해항로를 돕기 위해 당사도에 등대를 설치하였는데, 바로 이 등대를 1909년 1월 이준화 외 5명이 습격, 일본인 4명을 타살하고 시설물을 파괴한 의거를 감행하였던 사건이다. 당사도 등대사건은 이후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소안의 교육과 정신이 항일과 구국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에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으며, 소안도 주민들은 동학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그러나 혁명을 실패하고 김옥균을 살해했던 홍종우가 소안 상황을 밀고하면서 동학군과 관군이 충돌하였다. 이 때 이순보, 이강락 등 몇몇 주민들이 청산도로 끌려가 관군의 손에 총살 당했고, 이순천, 이준화는 동학군과 함께 도피하였다.


당사도 등대사건은 이후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소안의 교육과 정신이 항일과 구국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 소안의 노래

강한 의지와 정신의 선율, 마음이 부르는 정신의 노래 '소안의 노래'


옥중의 동지를 생각해 요를 깔지 않고 잠을 잤다. 항일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생각해 소안사람들은 엄동설한에도 '요를 깔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소안도 사람들을 만나서 항일운동(독립운동)을 했던 이야기를 전해 듣다보면 꼭 하는 이야기이다. 정남국, 정창남, 위경양 등 지도자들이 1928년 조직사건으로('춘경원당'사건) 신의주 감옥에 갇히자 이들의 고초를 생각해 요를 깔지 않고 잠을 잤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생각하는 '옥중가'를 지어서 불렀다. 누가 지었고 곡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팔순의 노인들은 콧노래처럼 흥얼거린다. 다행스럽게 지난 '소안항일운동사료집'편찬사업을 추진하며 채록되어 전하고 있다.


[옥중가]

평안북도 마지막 끝 신의주감옥아 이 세상에 생겨난 지 몇해되었나

이제부터 너와 나와 둘 사이에 잊지 못할 관계가 생기었구나

앞 뒤 상펴보니 철갑문이요 곳곳에 보이는 것 붉은 옷이라 슬프도다

감옥에 있는 우리형제들 이런 고생 저런 고생 악행당할 때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하나 장래 일을 생각하니 즐거웁도다

여보시오 같이 나갈 우리 앞길에 추호라도 낙심 말고 같이 나가세


당시 노래는 소안 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를 통해 학생들에게, 그리고 마을 야학을 통해서 주민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보급되었다. 당시 주민들이 불렀던 노래는 '학도가', '독립군가', '행진곡', '이별가', '애국가', '정몽주추모가', '망향가', '조기운동가', '소년단가', '여권신장가', '우승기가', '소년남자', '감동가', '대한혼', '부모은덕가' 등 헤아릴 수 없다.


다른 지역과 달리 소안도 주민들은 민요보다는 혁명가 등을 더 많이 불렀으며, 흔히 섬 지역에서 확인되는 '강강술래' 등은 그 이후에 불렸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런 노래를 필사한 '창가집'을 댓님을 묶은 바짓가랑이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배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배달청년회나 사립소안학교에서는 '소안극'을 많이 했다고 한다. 당시를 기억 하는 노인(1992년 조사한 내용)은 결혼을 해 막 낳은 자식을 두고 운동을 한다고 가버리는 사람, 투옥된 사람을 대본으로 만들어 '수동이 어머니 노래' 등을 연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주재소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당시 일젠느학교와 담을 사이에 둔 민가를 헐고 주재소를 설치해 24시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토지계정사건에서 승소를 기념한 환여대회에도 소안 중심인 비자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남쪽 끝 소진리에서 개최하였다. 뿐만 아니라 송내호 등이 주도한 3·1 만세운동과 관련해 태극기 제작은 남쪽 끝 월항리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다. 


다른 지역과 달리 소안도 주민들은 민요보다는 혁명가 등을 더 많이 불렀으며, 흔히 섬 지역에서 확인되는 '강강술래' 등은 그 이후에 불렸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런 노래를 필사한 '창가집'을 댓님을 묶은 바짓가랑이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배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배달청년회나 사립소안학교에서는 '소안극'을 많이 했다고 한다. 당시를 기억 하는 노인(1992년 조사한 내용)은 결혼을 해 막 낳은 자식을 두고 운동을 한다고 가버리는 사람, 투옥된 사람을 대본으로 만들어 '수동이 어머니 노래' 등을 연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주재소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당시 일젠느학교와 담을 사이에 둔 민가를 헐고 주재소를 설치해 24시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토지계정사건에서 승소를 기념한 환여대회에도 소안 중심인 비자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남쪽 끝 소진리에서 개최하였다. 뿐만 아니라 송내호 등이 주도한 3·1 만세운동과 관련해 태극기 제작은 남쪽 끝 월항리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다.


⊙ 소안의 교육

왜 소안이라는 작은 섬이 민족운동사에 큰 획을 그을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한양대의 박찬승 교수는 소안도는 양반층 혹은 지주층이라 할 만한 계층이 없이 대부분 평민층과 자작농층으로 구성되 어 주민들 상호간에 갈등의 소지가 적었다는 점, 한말 토지회수투쟁과정을 통해 주민들 간에 단합이 강화되었던 점, 다른 곳에 비해 일찍부터 신교육을 시작하여 문맹이 거의 퇴치될 수준에 이른 점, 지리적으로 중요한 항로에 자리해 외부 세계, 근대문명과 접할 수 있었던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진보적인 의식에 일찍 눈을 떴던 김사홍, 김경천, 송내호, 송기호, 신준희, 최형천, 강정태 등 뛰어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히고 있다.

 

- 사립소안학교

1920년대 후반에 운동의 지도부들이 대부분 옥고를 치렀고, 소안학교는 폐교되었다 그리고 끝내 송내호마저 옥중에서 병을 얻어 서거하면서 소안운동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소안학교와 운동의 과정에서 송내호 등의 지도를 받은 새로운 운동세대들은 1930년대 완더 일대의 적색농민조합운동에 참여하며 맥을 이어갔다. 올바른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갖춘 지도자와 이를 수용할 주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소안 사람들의 자긍심으로 남아있다.


그 동안 소안도에서 당시 항일운동 관련 독립유공자로 19명이 등록되었으며, 금년에 그 동안 조선공산당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되었던 정창남이 유공자로 추가되어 모두 20명으로 늘어났다.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에서 확인한 항일운동 관련자는 모두 88명이지만 유공자로 20명이 지정되었고 나머지는 입증자료나 사회주의 활동경력 등이 문제가 되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변화된 정세에 맞춰 독립유공자의 범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어 이후 유공자등록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이며,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의 개관과 함께 형식적인 사업들이 아닌 소안정신을 담은 기념사업도 본격 추진되길 기대한다.


▶ 소안도 소개

⊙ 소안도(所安島)

면적 23.16㎢, 해안선길이 42km의 소안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17.8km 지점에 있다.

소안도는 노화도·보길도·횡간도·자개도 등의 4개의 유인도와 6개의 무인도로 형성되어 소안군도를 이루고 있다.

임진왜란 때 동복 오씨와 김해 김씨가 처음 월항리에 입도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

주민들의 기개가 용맹하여 외부인들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해서 소안도라 했다고 한다.


최고봉은 가학산(350m)이며, 그 밖에도 부흥산(227.9m), 대봉산(337.6m) 등 기복이 비교적 큰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는 남쪽과 북쪽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너비 500m, 길이 1.3km 되는 사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섬이 되었다.


해안은 동쪽에 반도처럼 돌출된 부분을 비롯하여 곳곳에 소규모의 돌출부가 있다.

동쪽과 남쪽 해안은 암석해안이 대부분이며, 중앙의 사주와 북족 해안에는 간석지가 펼쳐져 있다. 기후는 대체로 해양성 기후를 나타내며, 1월 평균기온 2.5℃ 내외, 연강수량 1,332mm 정도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합고 있다. 농산물로는 쌀·보리·콩·고구마 등을 재배하며, 파인애플·귤·고추의 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근해에서는 멸치·민어·방어·도미·가오리·고등어 등이 잡히고, 굴·전복·미역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 대도해상국립공원 완도해상지구에 속하며, 문화재로는 완도 미라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339), 완도 맹선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340)이 있다. 유적으로는 비자리에 조선시대인 1874년(고종 11)에 설치된 소안진터와 항일 기념탑이 있으며, 맹선리 해안에 왜구가 침입하여 지었던 움막집터가 있다.


해수욕장으로는 과목해수욕장, 소강나루해수욕장, 진산리해수욕장, 부상리해수욕장 등이 있어 섬 주민의 휴식터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근에서 많은 피서객이 찾아온다. 그 밖의 볼거리로는 미라팔경, 횡간도, 사자바위, 당사도 등대, 제주목사 기녀비, 비자리 조개무지 등 이 있다. 각시여 전설, 도둑바위 등의 설화가 전해져오고 해마다 정월의 풍어제 습속이 이어지고 있다.


▶ 문의 

사단법인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 소앙항일운동기념관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소안로 263

○ TEL : 061-552-0516

○ SITE : http://www.gunsan.go.kr/tour/m2096/view/516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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