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사지

경상북도

망덕사지

054-779-6060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경북 경주시 배반동 956

관심 자원

개요

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망덕사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684년(신문왕 4)에 완성되었다고 하나 이와 달리 문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망덕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인 679년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을 빌어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 사천왕사를 짓는다는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다. 이에 신라에서는 당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을 속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천왕사의 건너편인 이곳에 절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당나라 황제의 만수를 빌기 위하여 절을 지었다’하여 당나라를 속일 수 있었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절을 정식으로 다시 짓고 692년(효소왕 1)에 낙성재를 베풀었다. 755년(경덕왕 14)에는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라서 그러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삼국유사》에는, 효소왕이 699년에 이 절에서 낙성회를 열고 친히 참석하였는데 차림이 남루한 중이 재에 참여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여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왕이 교만한 마음이 일어 중에게 왕이 자리한 재에 참여하였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 하였다. 중이 웃으며 진신석가를 공양하였다는 말을 하시지 말라 하고 하늘로 날아갔으며 왕이 놀라 예배를 드렸다는 설화가실려 있다. 또 이 절의 승려인 선율(善律)이 6백부의 《반야경》을 베껴 쓰다가 미처 마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명부에 가서 경을 베끼는 작업을 마치기를 원한다고 하여 죽은 뒤 10일이 지난 다음 다시 살아났다는 설화도 있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폐사의 시기도 분명하지 않다. 이 절터에 대해서는 1969년과 1970년 2차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는 1969년에 목탑지를 조사하였고, 1970년에는 금당지·동회랑지·북회랑지가 조사되었다.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도깨비기와, 명문 전, 개원통보, 고려시대의 청동정병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탑은 금당지에서 69척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사방 3칸이고 탑의 심초는 8각형이며 중심에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사각형 구멍이 있다. 중문지는 탑지에서 63척 떨어진 곳에 자리하며 금당의 좌우에는 익랑이 있다. 중문지의

남쪽에 있는 계단터는 폭 10.5m·추정 높이 5.4m 내외이며, 계단의 서쪽에는 8각형 돌기둥을 세워 난간기둥으로 하였다.
사지에는 동·서쪽에 목탑지가 남아 있으며 그 북쪽으로 금당지가 자리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즉 금당지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목탑지가 있고 그 남쪽으로 중문지가 있다.
그리고 금당지의 북쪽으로 강당지가 있으며 이들을 둘러싸는 회랑지가 있다.
금당의 좌우에도 회랑, 즉 익랑지가 있으며 중문지의 남쪽에는 계단터가 있고 그 서쪽에는 보물 제69호인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당간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幢)이라는 기를 달던 깃대를 말하며, 당간지주는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이른다.
이 당간지주는 망덕사터 서쪽에 65㎝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표면에 아무런 조각과 장식을 두지 않는 대신, 지주 바깥면의 모서리를 윗부분부터 줄어들게 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내었다. 기둥머리는 안쪽 측면에서 바깥면으로 내려오면서 곡선을 그리며 외부로 6㎝쯤 깎여져 경사를 이루고 있고, 안쪽 윗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만들었다.
각 면에 비록 조각은 없으나 소박하고 웅장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망덕사는『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에 창건된 사찰인데 이 당간지주도 당시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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