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수 의병장 유적지

6월 1일, 의병의 날

한봉수의병장 유적지

제한없음

한봉수 의병장 유적지

국가보훈처

043-299-6626

충북 청원군 내수읍 학평리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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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말 청주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한봉수는 1883년 4월 18일 현 청원군 북이면 세교리 197번지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청주이고 호는 청암(淸巖)이입니다.

 

한봉수는 1907년 9월경 고향인 세교리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청주 일원과 인근의 청원·괴산·미원·보은 등 충북 지역은 물론, 강원과 경북일원을 왕래하면서 투쟁을 전개하였답니다.

 

한봉수 의병부대는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를 처단하고, 밀정과 변절자를 혼내주고, 일본군과 직접 교전도 하면서 우편행랑을 기습하는 등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면서 유격전을 벌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를 ‘번개대장’이라고 불렀답니다.

 

번개대장 한봉수가 이끈 의병부대는1907년 9월부터 1910년 2월까지 곳곳에서 크고 작은 유격전을 벌였는데요 모두 33전 1패의 전과를 거두었으나, 한봉수 의병부대의 활동은 1910년에 들어와 크게 위축되었답니다. 일제의 감시망도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장기간의 투쟁으로 식량과 무기의 공급도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제에 의해 활동 근거지가 철저히 파괴당하였고, 부하들도 대부분 피체되어 의병부대가 와해된 상태였고 ,그래서 한봉수의 의병투쟁은 1910년 2월 청주 오송 출현이 마지막이었답니다.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한봉수는 1910년 5월 12일 귀순의사를 표시한 뒤 일단 서울로 잠입하였으나, 5월 15일 급파된 충청북도 경찰부 소속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결국 청암 한봉수는 1910년 6월 29일 공주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열린 재판에서 소위 내란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일제가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를 완전히 빼앗은 뒤 회유책으로 내린 대사면령으로 출옥할 수 있었습니다. 출옥 후에도 일제의 눈을 피하여 서울을 왕래하면서 애국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래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청암 한봉수는 손병희를 비밀리에 만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청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 다음 3월 7일 청주 장날을 기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인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습니다.

 

4월 1일에는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 장터에서 다시 면민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 다시 내수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이때 한봉수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 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1972년 12월 25일에 노환으로 운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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